[유주현의 비욘드 스테이지] 뮤지컬 ‘아이다’ 두 주역 김수하·민경아
뮤지컬계 티켓파워는 통상 남자배우들이 쥐고 있다. 서양 고전 명작을 원작 삼는 무대가 많은 대극장 계열에선 더욱 그렇다. 요즘은 많이 다양해졌지만, 전통적으로 남자배우들이 멋짐을 폭발시키는 영웅서사에서 여배우들이 서포트 역할에 머무는 작품이 많았기 때문이다.
‘아이다’ 만큼은 달랐다. 국내 뮤지컬 산업 초창기이던 2005년 초연된 ‘장군과 공주의 러브스토리’이지만, 장군인 라다메스 보다 아이다와 암네리스라는 두 공주가 부각됐다. 역대 주인공들인 옥주현·정선아, 윤공주·아이비가 팽팽한 대결구도를 이루며 주요 뮤지컬상 후보에 나란히 오르기도 했다.
이번 시즌 아이다와 암네리스로 합류한 뉴캐스트 김수하(28)와 민경아(30)도 그 계보를 잇는다. 김수하는 ‘미스 사이공’ 오리지널 투어 주인공으로, 민경아는 지난해 ‘시카고’에 발탁되며 주목받고 있는 차세대 스타들. 대중적 인지도보다 탄탄한 실력만으로 마니아 팬덤을 확보한 경우라 더 눈길이 쏠린다.
엘튼 존·팀 라이스의 브로드웨이 원작
이들을 만난 건 두 사람의 첫공 바로 다음날이었다. 사실 무대를 보고 깜짝 놀랐다. 시그니처 넘버인 일명 ‘충분해’(Dance of the Robe) 장면부터 시종일관 폭풍성량을 과시하는 김수하, 무대를 열고 닫는 무게감과 통통 튀는 코믹연기를 거침없이 오가는 민경아는 이미 ‘라이징’이 아니라 ‘대배우 각’이었다. 오랜만에 띄어앉기와 함성자제 없이 개막한 공연을 찾은 관객들도 아낌없는 환호와 열광을 보냈다.
“직전까지 엄청 떨었는데 막상 무대에 서니까 차분해졌어요. 제가 첫곡을 시작하며 막을 열어야 되는데, 객석이 다 내편인 것 같은 느낌이 들더군요. ‘얼마나 잘하나 보자’가 아니라 ‘너희를 환영할 준비가 됐다’는 느낌? 그래서 지금까지 했던 첫 씬 중에 제일 잘했어요. 부르면서도 이게 무슨 일이야, 내가 너무 잘하고 있네 싶었죠.(웃음) 객석을 꽉 채운 관객에게 큰 힘을 받은 것 같아요.”(경아)“저도 개막 전엔 작품을 끌고나가는 사람이란 생각이 지배하면서 압박감이 컸거든요. 꿈에서까지 ‘충분해’를 부르며 대회를 나갈 정도였죠.(웃음) 리허설 때도 가슴이 터질듯했는데, 꽉 찬 객석 보는 순간 정말 행복했어요. ‘충분해’를 부르니 박수가 안 끝나고 함성까지 들리는데, ‘아, 내가 이것 때문에 하는 거였지’ 싶더군요.”(수하)
이번 시즌 ‘아이다’가 특별한 건 2019년 마지막 시즌을 선언했다가 부활했기 때문이다. ‘아이다’는 2000년 브로드웨이에서 초연된 엘튼 존, 팀 라이스 콤비의 대표작인데, 제작사 디즈니가 뉴 프로덕션을 만든다며 전세계에서 라이선스를 거둬들이기로 한 것. 하지만 팬데믹 탓에 제대로 마무리를 못해 다시 돌아왔고, 두 사람은 진짜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회를 잡았다.
“제가 ‘충분해’로 대학에 붙었어요. 또 학교 축제 갈라에서 그 곡을 불렀던 영상으로 유명해지기도 해서 ‘아이다’는 저에게 선물같은 작품이에요. 꼭 한번 실제 무대에 서보고 싶은 로망이 있었죠. 지난 시즌 일정이 안 맞아 훗날 뉴 프로덕션에 도전하려고 했는데, 운명처럼 제게 왔네요. 내가 해야만 하는구나. 마치 공주의 운명을 받아들인 아이다의 마음이랄까요.(웃음)”(수하)“저는 10년 전 공연을 학교 동기들이 보고 와서 암네리스에 제가 딱이라는 얘기를 했었거든요. 너무 매력적이고 사랑스러운 역할이라고.(웃음) 지난 시즌 마지막이라길래 내 것이 아닌가 보다 했는데, 이렇게 만나게 됐네요.”(경아)
‘아이다’는 그간 국내에서만 100만 관객을 모은 스테디셀러로, 이번 시즌에도 윤공주·아이비·전나영·김우형·최재림을 비롯해 앙상블까지 백전노장들로 포진된 완성도 높은 무대를 자랑한다. 뉴캐스트이자 막내인 두 사람이 느끼는 부담이 유독 큰 이유다. 둘 다 입체적으로 변화하는 성장 캐릭터가 부담스럽다며 입을 모았지만, 걱정할 필요는 없어 보였다. 개막 초기지만 이미 아이다와 암네리스 그 자체인 양, 역할에 푹 빠져 있기 때문이다. 뮤지컬치고 수위가 높은 편인 애정씬도 문제없다고 했다.
“사랑 나누는 장면은 연출님이 ‘보기에 불편해야 한다’고 하셨거든요. 실제 상황이라면 누가 보지 않겠지만 무대에서는 관객이 훔쳐보는 느낌이 들 테니까요. 정말 그 순간 우리밖에 없다고 생각하고 연기해요. 상대는 내가 사랑에 빠진 이집트의 한 남자고, 저는 아이다죠. 제 목표는 관객을 불편하게 하는 건데, 연출님도 첫공 보시고 너무 불편했다고, 아주 좋았다고 하셨어요.(웃음)”(수하)“암네리스는 라다메스에게 희망고문을 당하지만 주변에서 얘기해 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 외로운 인물이에요. 공주에게 친구가 아무도 없는 거죠. 누구에게도 속마음을 터놓을 수 없다는 게 아무리 연기라지만 외롭더군요.”(경아)
유독 절친 호흡인 두 사람은 10년 전 입시학원에서 처음 만난 사이다. 두 살 위인 경아가 대입에 성공한 뒤 입시 작품을 수하에게 물려주면서 시작된 인연이다. “그때 전 고3이라 대학에 간 언니가 선망의 대상이었죠. 예쁘고 차가운 얼음공주 느낌이었어요.(웃음) 언니처럼 되고 싶었고, 나중에 언니 공연도 많이 보러 다녔죠.”(수하) “그때부터 눈빛에 열정이 가득한 아이였고, 저도 최선을 다해 입시 안무를 전수해준 기억이 나요. 그후 해외에서 ‘미스 사이공’ 주인공을 한다길래 궁금했죠. 2020년 ‘렌트’ 때 처음 작품으로 만났는데, 역시 잘하더군요. 많은 자극을 받았어요.”(경아)
각각 ‘미스 사이공’ ‘웃는 남자’ 등 섭렵
학원 선후배지만 프로 데뷔는 둘 다 2015년이다. 수하는 웨스트엔드에서 ‘미스 사이공’으로 데뷔해 해외투어 버전에서 맹활약했고, 오는 9월 호주에서 열리는 알랭 부빌과 클로드 미셸 숀버그 뮤지컬 콘서트에 섭외될 정도로 ‘해외파’가 됐다. 경아는 ‘웃는 남자’ ‘레베카’ ‘시카고’ ‘지킬앤하이드’ 등 굵직굵직한 무대의 여주인공을 두루 섭렵했다.
어린 시절부터 배우를 꿈꿨다는 두 사람은 끼가 철철 넘쳤고, “장르를 가리지 않겠다”는 포부에는 무한 가능성이 엿보였다.
“워낙 어릴 때부터 연기를 좋아했어요. 드라마 대사를 다 외워서 어른들 앞에서 연기를 흉내내는 골때리는 아이였죠. 개그 코너까지 따라해서 개그우먼하라는 말도 많이 들었어요. 엄마가 ‘예쁜말 고운말만 하라’고 동요를 시켜서 노래를 시작했는데, 뮤지컬엔 제가 좋아하는 노래와 연기와 춤이 다 있더군요. 하지만 연극도, 매체 연기도 기회가 되면 하고 싶어요. 만능 연기자가 되는 게 꿈이죠.”(경아) “저는 초등학교 때 부모님과 봤던 대학로 소극장 뮤지컬에서 노래하던 배우의 모습이 너무 강렬했어요. 그 언니의 행복한 얼굴이 너무 충격적이라 오히려 공연은 기억에 안 남고 그 장면만 지금까지 또렷할 정도죠. 나도 저렇게 무대에 서면 행복할 것 같았어요.”(수하)
20대에 최고의 무대에 도달한 행운아들이지만, 당찬 MZ세대 답게 바람도 있다. 대형 뮤지컬에서도 고전적인 여성상을 탈피하는 캐릭터가 많아졌으면 한다는 것이다.
“예전부터 주체적인 여성상을 표현해온 디즈니를 ‘리스펙’해 왔고, ‘아이다’ 처럼 여배우가 주목받는 작품을 만나서 행운이고 감사해요. 2019년 국내무대에 ‘외쳐, 조선’으로 처음 섰을 때 여성 관객분들이 폭발적으로 반응해 주시는 걸 보고, 결국 여성 관객이 보고 싶은 건 여자가 강렬한 인상을 남기는 작품이란 걸 알았거든요. ‘아이다’도 관객분들 에너지와 호응이 다르더군요. 이런 작품이 더 많아지면 좋겠어요.”(수하) “암네리스의 눈으로 시작해서 암네리스의 말로 끝내는 무대라서 그런지 커튼콜 끝나고 나갈 때 정말 뿌듯해요. 우리가 관객을 대변한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모습에 대리만족할 수 있는 캐릭터가 많이 생겨나면 관객도 그 안에서 힘 받지 않을까요. 저는 좀 거친 역할도 하고 싶어요. 파워풀하고, 날것 느낌이 나는 역할도 꼭 해보고 싶습니다.”(경아)
중앙선데이 /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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