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리뷰] ‘시라노’는 시라노다 그리고 홍광호는 홍광호다!
2017.07.18 / 브릿지경제 – 허미선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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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시라노’.(사진제공=RG, CJ E&M) |
앙상하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단출한 무대와 조명으로 오롯이 인물과 배우에 집중하게 하는 영리함이 돋보인다. 물론 화려한 세트와 조명을 바랐던 관객에게는 실망감으로 다가갈지도 모른다. 하지만 제목 그대로 ‘시라노를 위한, 시라노에 의한, 시라노의’ 뮤지컬 ‘시라노’(10월 8일까지 LG아트센터)에는 꽤 유용하게 작용한다.
뮤지컬 ‘시라노’는 문필가이자 달변가이며 용맹한 군인이었던 실존인물 시라노 드 베르주라크의 삶에 상상력을 불어넣은 에드몽 로스탕 원작을 ‘지킬앤하이드’의 명콤비 레슬리 브리커스(대본·작사)와 프랭크 와일드혼(작곡)이 풀어낸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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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시라노’의 록산 린아와 크리스티앙 서경수.(사진제공=RG, CJ E&M) |
2009년 일본 토호 제작으로 초연된 이래 8년만에 한국에서 첫선을 보이는 ‘시라노’의 연출은 ‘살짜기 옵서예’ ‘지붕 위의 바이올린’ ‘파리의 연인’ 등의 구스타보 자작이 맡았다.
대한민국 뮤지컬계를 대표하는 배우 류정한의 프로듀서 데뷔작이기도 한 ‘시라노’의 힘은 원작과 배우들에 있다.
시라노 역의 홍광호·류정한·김동완을 비롯해 그가 마음을 다해 사랑한 여인 록산 역의 린아·최현주, 그녀가 사랑한 크리스티앙 서경수·임병근, 시라노·크리스티앙 부대의 지휘관이자 록산을 사랑하는 드기슈의 이창용·주종혁, 시라노의 벗 르브레를 연기하는 김대종·홍우진까지 놀라운 배우들이 즐비하다.
커다란 코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당당하고 정의로우며 달변가이자 시인답게 은유적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시라노는 시작부터 끝까지 주인공으로서 극을 이끈다.
1막은 그런 시라노의 매력을 알 수 있는 장면들을 촘촘하게도 배치했다. 다소 지루하고 밋밋하게 느껴질 수도 있지만 이처럼 주인공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게 하는 대극장 극도 최근 들어 오랜만이다.
문제는 ‘시라노’라는 고전작품이 가진 시대상이다. 17세기 파리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가 2017년을 살아가는 이들에게 얼마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을까는 제작진이 풀어야할 숙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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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시라노’의 드기슈 주종혁과 록산 최현주.(사진제공=RG, CJ E&M) |
하지만 록산에 대한 시라노의 사랑은 가슴을 답답하게 하고 크리스티앙·드기슈와 엮어가는 우정이나 전우애는 존재감을 드러내지 못한다. 오롯이 시라노에 집중한 작품에서 여타의 캐릭터들은 미미하거나 왜곡된 존재가 돼 버린다.
시라노를 비롯한 세 남자가 사랑해 마지않는 록산은 그 최대 피해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수적인 17세기 프랑스에서 록산은 사랑을 찾아 전쟁터로 향할 정도로 용감하고 진취적인 여성이었다. 시라노가 전하는 시적 은유도 속 깊게 이해하는 이지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하지만 ‘시라노’를 바탕으로 변주된 그 많은 작품 중 어디에서도 록산의 그 매력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했다. 뮤지컬 ‘시라노’ 역시 그렇다.
근사한 외모의 크리스티앙에 한눈에 빠져들었고 그런 그가 수려한 시구와 달변으로 자신을 향한 사랑을 표현하지 못하자 실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크리스티앙을 대신해 편지로 마음을 전하는 시라노에게는 깜짝 결혼식을 할 수 있게 드기슈를 따돌려 달라 부탁하고 전쟁터로 향하는 자신의 남편이 배고프거나 춥지 않고 위험하지 않도록 지켜달라 애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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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시라노’.(사진제공=RG, CJ E&M) |
극 초반 악역 혹은 코믹 캐릭터처럼 등장해 록산에게 허세와 권위로 사랑을 표현하던 드기슈의 마음마저 거짓말로 속이는 록산은 생각이나 고민이라고는 없이 사랑을 가볍게 여기는, 지적 허영심으로 가득 찬 ‘금사빠’(금방 사랑에 빠지는 사람)로 오해하기 좋은 캐릭터로 그려진다.
단순하지만 우직하게 전달하려는 크리스티앙의 마음이나 다소 왜곡돼 표현되는 드기슈의 감정은 가련하게도 록산에 닿지 못한다. 결국 록산을 사랑하는 그 누구의 마음에도 존중을 표하지 못한 것처럼 비쳐진다.
사실 이야기나 캐릭터 보다 심각한 건 오마주(영화에서 존경의 표시로 다른 작품의 주요 장면이나 대사를 인용하는 것)인지 클리셰(진부한 표현이나 고정관념)인지 알 수 없는 장면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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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시라노’의 시라노 홍광호.(사진제공=RG, CJ E&M) |
브로드웨이 창작진들의 시스템화 혹은 정형화된 표현법으로 점철된 극은 보는 내내 ‘맨 오브 라만차’나 ‘두 도시 이야기’ ‘삼총사’ ‘레미제라블’ ‘팬텀’ 등 다양한 작품의 여러 장면들을 스치게 한다.
특정 작품이 아니더라도 프랑스 파리, 칼싸움, 전쟁, 발코니, 결혼식 등 고전작품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들이 그저 나열될 뿐이다.
그럼에도 ‘시라노’가 시라노인 것처럼 홍광호는 홍광호다.
홍광호가 부르면 ‘삐라빠라뽀’(1막 중 크리스티앙과 록산이 결혼식을 마칠 수 있도록 시라노와 친구들이 외계인으로 변장해 드기슈를 속이는 넘버 ‘달에서 떨어진 나’의 가사)라는 유치한 가사도 유쾌하게 변모한다.
저음은 저음대로 고음은 고음대로 사랑을 표현하지 못해 애절한 멜로디는 그대로 정확하게 표현된다. 앙상블들과 함께 하는 넘버 역시 독보적인 존재감을 보이면서도 하모니를 제대로 이뤄내는 영리함도 돋보인다.
낭만적인 달 아래서 부르는 러브송이나 외모 콤플렉스로 사랑을 한껏 표현할 수 없어 느끼는 고독감, 용맹한 면모를 보이는 군인다움 등도 오롯히 시라노를 위한 것처럼 표현해낸다. 그렇게 ‘시라노’는 시라노를 연기하는 다른 배우가 궁금해질 정도로 ‘시라노를 위한, 시라노에 의한, 시라노의’ 뮤지컬이다.
허미선 기자 hurlkie@viva100.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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