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웨스트엔드 배우 전나영 “이제 한국 무대가 우선”
2019.10.30 / 중앙일보 – 김호정 기자
내달 막 오르는 ‘아이다’ 주역
뮤지컬 배우 전나영(30)은 한국에서의 ‘아이다’를 위해 런던 웨스트엔드의 공연 투어를 포기해야 했다. 지난해까지 런던에서 공연했던 ‘킹앤아이’의 해외 공연이었다. “아직 ‘아이다’ 오디션에 합격하기도 전이었지만, 혹시 합격하면 두 공연이 겹쳤거든요. 생각할 것도 없이 한국의 ‘아이다’를 골랐어요.”
전나영은 2013년 웨스트엔드에서 먼저 데뷔한 독특한 경력의 배우다. 런던에서 ‘레미제라블’의 판틴 역을 맡은 최초의 동양 배우로 기록된 뒤 2015년 한국에서 같은 역으로 무대에 섰다. 전세계 뮤지컬의 수도와 같은 웨스트엔드에서 이후 ‘미스사이공’ ‘킹앤아이’에 출연해왔지만 마음은 늘 한국을 향했다.
2016년 한국 ‘아이다’ 공연의 오디션에서 고배를 마신 후 3년동안 준비해 다시 도전해 기회를 얻었다. “어릴 때 처음으로 본 뮤지컬이 ‘아이다’였어요. 연약하지 않은 아이다라는 여성에 푹 빠져서 꼭 해보고 싶었던 역이었어요.” 28일 만난 전나영은 “이번 무대를 계기로 한국에 정착하려 해요. 이제 웨스트엔드보다 한국 무대가 우선이에요”라고 했다.
전나영은 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가족은 현재 헤이그에 정착해있고 전나영은 네덜란드ㆍ영국ㆍ한국을 오가며 무대에 섰다. “원래는 어디에도 정착하고 싶지 않았어요. 그런데 이제는 어디에서나 이방인인 생활 대신 한국에 머물고 싶어졌어요.”
노래와 드라마에 대한 관심은 1993년 나온 영화 ‘서편제’를 보면서 시작됐다. “판소리라는 걸 그때 처음 알게 됐는데 정말 하고 싶었어요. 영화 마지막에 나오는 심청이 물에 빠지는 대목을 정말 많이 공부해서 한국어로 네덜란드 학교에서 공연하기까지 했죠.” 전나영은 “심청의 아버지를 보면 이상하게 나의 아버지가 겹쳐요. 아는 것도 많고 멋지시지만 네덜란드에서는 부자유해 보이죠. 이방인이라는 게 저의 중요한 관심사가 된 이유인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자신의 관심사를 이용해 다양한 형태의 공연을 만드는 것이 그의 먼 목표다. 전나영은 네덜란드 로테르담 예술대학에서 극작과 연출을 공부했다. 처음부터 배우가 될 생각은 없었다. “새로운 형태로, 지금 생각하면 좀 건방진 예술을 하고 싶었는데 뚜렷한 계획을 세우지 못했어요. 처음 들어간 학교에서는 하고 싶은 게 분명하지 않아서 방황하다 쫓겨났을 정도였어요.” 뮤지컬 배우가 아니라 무대 작업을 하고 싶었지만 네덜란드에서 우연히 오디션을 봤고 그 후 웨스트엔드에서까지 발탁이 됐다. 타고난 성량과 짙은 음색으로 드라마틱한 역할을 주로 맡았다.
전나영은 자기 일을 배우에 한정하지 않는다. “스마트폰 오케스트라 같은 걸 생각하고 있어요. 관객이 공연에 참여하면서 많은 메시지를 만들 수 있어요. 이방인의 문제, 기후변화 등 이 순간에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걸 무대에서 풀어낼 수 있다 생각해요.” 그는 “당분간 배우 역할에 집중하면서 이런 아이디어들을 차곡차곡 모을 것”이라고 했다.
이런 아이디어를 실현하기에 한국은 좋은 무대다. “웨스트엔드는 무엇보다 역사가 대단하죠. 극장에 들어선 순간 밟는 카페트부터 무대까지요. 하지만 배우보다는 작품의 파워가 더 커서 배우로서 활동 폭이 좁게 느껴지는 면이 있어요. 한국은 배우의 미래가 훨씬 다양하고 흥미진진해요.”
2016년 ‘아이다’ 역할을 따지 못한 건 발음 때문이었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나 자랐고, 아버지는 경상도 대구 억양으로 말씀하시기 때문에 희한한 한국 발음으로 대사를 했거든요.” 그는 3년 동안 이 부분을 집중적으로 연습하며 주연을 따냈고 이번 작품의 연습이 시작하기 두 달 전에 먼저 귀국해 역할에 집중하고 있다. “아이다는 동물 중에도 사자 같은 여성이에요. 야생적이고 동물적인 느낌이 있고 자부심과 지혜로 나의 왕국을 보살피죠. 무대에 오르면 아이다의 모든 영혼을 보여드리고 싶어요.”
뮤지컬 ‘아이다’는 다음 달 13일부터 내년 2월 23일까지 서울 한남동 블루스퀘어에서 공연된다. 2005년 한국에서 초연된 후 이번이 5번째이며 마지막 시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