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12년 만에 돌아온 홍광호, ‘스위니 토드’가 다시 완벽해졌어!
2019.10.09 / 서울뉴시스 – 이재훈 기자
2007년 토비아스 역에서 이번에 타이틀롤로
옥주현·신주협 등 열연
거장 스티븐 손드하임 작품
홍광호, 뮤지컬 ‘스위니 토드’ ⓒ오디컴퍼니 【서울=뉴시스】이재훈 기자 = “내 오른팔이 다시 완벽해졌어!”
아내와 딸을 빼앗기고 외딴 섬으로 추방을 당한 뒤 15년 만에 돌아온 비운의 이발사 벤자민 파커가 스위니 토드가 돼 은빛 칼을 드는 순간, 핏빛 복수의 전주곡이 울려 퍼졌다. 토드는 죽음을 뜻하는 독일어에서 따왔다.
명불허전(名不虛傳). 3년 만에 돌아온 ‘스위니 토드'(연출 에릭 셰퍼) 역시 다시 완벽해졌다. 2007년 국내 초연 이후 9년 만에 돌아온 2016년 공연 당시 업계를 강타했던 작품이다. 이번에도 위력이 대단하다. 작품성, 스타성, 메시지의 황금 비율 조합은 극 중 러빗 부인이 구워낸 파이처럼 바삭바삭했다.
8일 밤 잠실 샤롯데씨어터에서 지켜본 스위니토드 역의 홍광호·러빗 부인 역의 옥주현 조합 역시 반갑고 벅차고 놀라웠다.
상업적인 뮤지컬 장르에서 이례적으로 전위적인 음악과 무대 언어를 선보이는 스티븐 손드하임의 걸작 뮤지컬이다. 하지만 2007년 LG아트센터에서 국내 초연할 당시 그로테스크함과 난해함으로 관객의 외면을 받았다.
류정한, 임태경 등 쟁쟁한 스타들의 호연과 작품성이 어우러졌지만 뮤지컬은 밝은 판타지라는 인식이 강했던 당시 뮤지컬 관객층은 이발사의 복수극에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지킬앤하이드’를 비롯 라이선스를 한국식으로 변주하는데 일가견이 있는 신춘수 오디컴퍼니 대표 손길이 묻어난 2016년 버전에서 상황은 반전됐다. 원작의 아우라를 존중하면서도 군데군데 대중적인 요소를 삽입, 흥행에서도 성공했다.
2016년 버전과 이번 시즌에서 가장 달라진 점은 무대. 여백이 도드라졌던 모던한 무대가 그로테크스한 버전으로 바뀌었다. 그래도 ‘배우의 예술’인 무대는 배우가 누구냐에 따라 분위기가 확확 달라진다.
이번에 스위니 토드 역으로 처음 합류한 홍광호는 기대치를 훌쩍 뛰어넘는다. 사실 홍광호는 2007년 스위니 토드에서 파이집 조수 ‘토비아스’로 주목 받았다. 과거에 학대를 당해 마음이 온전치 않지만 순수한 정신을 가지고 있는 인물.
특히 마지막에 광적인 모습은 이 작품의 그로테스크함을 압축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토비아스의 홍광호 버전은 몽롱하면서도 영적(靈的)이었다. 노래 잘하던 배우로 통하던 그가 연기력까지 검증 받았던 작품이고, 이후 주연급 배우로 성장했다.
12년 만에 다른 배역을 맡아 같은 작품으로 돌아온 홍광호의 스워니 토드 역시 심상치 않다. 극 초반 인장과도 같은 그의 달달한 목소리는 숨겨져 있다. 자신의 아내와 딸을 빼앗은 터핀 판사에 대한 복수심이 단련시킨, 불타오르는 도끼 날 같은 목소리가 한껏 벼려져 있다.
그러다 터핀 판사에게 복수할 기회가 찾아온 순간에 부르는 ‘프리티 우먼’에서 감춰져 있던 그의 로맨틱한 목소리가 뿜어져 나온다. 이 달콤한 긴장감 속 한 마디 한 마디 안에 홍광호의 창법과 호흡법이 수시로 바뀐다.
‘지킬앤하이드’ 등을 통해 이미 증명됐지만 홍광호의 음색이 얼마나 변화무쌍한지 보여준다. 연기력은 어떤가. 결국 최악의 비극으로 끝나는 마지막에 허무한 눈빛은 전율을 일게 한다.
2007년 토비아스를 맡았을 당시 홍광호는 언론과 인터뷰에서 마흔살이 되면 스위니 토드를 정말 잘할 것 같다고 이야기를 했다. 현재 그의 나이는 만 37세. 12년 전 신예 타이틀을 달았던 배우는 이제 뮤지컬계 주축 배우가 돼 자신의 꿈을 하나둘 씩 이뤄가고 있다.
2016년 러빗 부인으로 이미 검증된 옥주현은 이번에 한발 더 나아간다. 스위니 토드에게 연정을 품고 그의 복수를 돕는 파이가게 주인이다. 푼수끼를 간직한 귀여움을 한층 더 무장했다. 본의 아니게 비극을 만드는데 일조하는 캐릭터에 연민을 더 부여한다. 표현력도 한층 더 능수능란해졌다.
이날 눈에 띈 다른 배우는 토비아스 역의 신주협이다. 작년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을 통해 대학로 신예로 부상한 그는 이번에 쟁쟁한 배우들 속에서도 존재감을 잃지 않는다. 특히 마지막에 순수하던 얼굴이 광기로 싹 변하는 모습은 극에 방점을 찍는다. 터핀 판사 역의 서영주의 능청스런 연기, 조안나 역의 최서연의 맑은 목소리도 기억해야 한다.
뮤지컬 ‘스위니 토드’ ⓒ오디컴퍼니
무엇보다 스위니 토드를 이야기할 때 손드하임의 음악을 빼놓을 수 없다. 올해 초연 40주년을 맞은 이 뮤지컬이 여전히 문제작으로 남겨져 있는 것은 파격적인 내용뿐 아니라 음악의 덕도 크다.
‘스위니 토드’의 넘버들은 싱얼롱 용이 아닌 순전히 캐릭터와 극의 성격을 드러내기 위한 것이다. 안소니가 부르는 ‘조안나’처럼 귀에 부드럽게 감기는 넘버도 있지만 대체로 불협화음이다. 멜로디와 리듬마다 웅크린 손톱, 발톱, 비수를 감추고 있는 듯한 불길한 음들은 작품의 그로테스크한 분위기를 이끌며 비극의 바람을 몰고 온다.
19세기 런던의 귀족주의와 초기 산업혁명에서 인간성을 잃어버린 세태를 풍자하는 작품에 톱니바퀴처럼 맞물린다. 자신의 가정을 파탄시킨 터핀 판사에게 복수를 하는 과정에서 광기의 살인을 저지르는 이발사 스위니 토드와 그가 내놓은 시체로 인육파이를 만들어 파는 ‘러빗 부인’의 이야기는 잔혹하지만 공감할 수 있는 냄새를 풍긴다.
토드와 러빗 부인이 시체를 가지고 파이를 만들기로 결심하는 1막 마지막 부분은 지난 공연에도 끊임없이 회자됐던 부분인데,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공무원 어때?” “아주 든든해” “꽉 막혔잖아” “그래도 아주 잘 나가. 실속 넘치는 안전빵이라”, “선거 때 별미인 정치인 뱃살파이” “도둑놈과 사기꾼을 섞은 맛” 등 상황은 잔혹하지만 지금을 겨냥한 적확한 풍자가 묘한 카타르시스를 안기며 그간 뮤지컬에서 체험하지 못한 정서를 안겨 준다.
배우, 음악, 메시지의 환상적 조합은 한국 뮤지컬 신에서 미답(未踏)의 장르 영역을 뚫는다. 대형 뮤지컬 장르가 갈수록 다채롭게 변하고 있지만 특히 ‘스위니 토드’의 공연은 심장 충격에 버금간다.
미국 브로드웨이에서 거장 대접을 받는 손드하임이 어렵다고, 주저하지 말라. 특정할 킬링 넘버가 없지만 터핀 판사의 음흉함과 러빗 부인의 수다스러움 등 캐릭터의 성향이 체화된 넘버, 이중창·합창에서도 제각각인 화음의 불연속성, 귀가 불편함의 연속인 가운데서도 선율만 흐르는 곳에서 문득 배어 있는 서정성 등 음악은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는 듯한 쾌감을 안긴다.
특히 마지막에 스위니 토드는 복수에 성공하지만 곧 그리스 비극을 연상케 하는 허무함의 수렁으로 스멀 스멀 빠져들 때가 화룡점정. 단조의 어두컴컴하고 답답한 선율 속에 똬리를 틀고 있는 비극성. 이것으로 불가해한 운명을 논하는 손드하임의 치명적 오싹함. 뮤지컬 신세계가 여기 있다.
이번 시즌에는 홍광호 외에도 조승우, 박은태가 스위니 토드 역에 트리플캐스팅됐다. 조승우·홍광호·박은태는 뮤지컬계를 주름잡는 톱 트리오다. 올 상반기에 ‘지킬앤하이드’ 타이틀롤에 나란히 캐스팅돼 티켓파워를 자랑했고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2016년 새로운 스위니 토드를 선보인 조승우는 3년 만에 같은 역을 맡는다. 박은태는 이번에 처음 스위니토드를 맡는다. 러빗 부인은 옥주현 외에 김지현, 린아도 연기한다. 공연은 2020년 1월27일까지 샤롯데씨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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