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는 15~18일ㆍ국립극장 ‘합★체’
저신장 장애인 父ㆍ쌍둥이의 성장담
농인 번역, 장애인 배우로 ‘당사자성’ 강조
배우와 그 옆의 ‘그림자 통역사’ 일체
수어와 대사, 안무, 행동 맞추는 과정
“자막과 연기 일심동체, 애드리브 금지”
진화한 배리어프리 공연과의 만남
“공존·소통 넘어 장르로 인식됐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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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지리 작가의 소설 ‘합★체’를 원작으로 한 동명의 음악극 ‘합★체’의 김지원 연출가와 배우 박정혁, 이성민, 김범진(왼쪽부터)은 이 작품은 “언어, 공연의 장르, 무장애 등 모든 것의 합체”라고 입을 모았다. 박해묵 기자 |
[헤럴드경제=고승희 기자] “사람들은 아버지를 난쟁이라고 불렀다. 사람들은 옳게 보았다. 아버지는 난쟁이였다. 사람들은 아버지의 모든 것을 옳게 보고 있었다. 난쟁이라는 것 외에, 사람들이 아버지에 대해 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소설 ‘합★체’ 중)
소설은 이렇게 시작한다. 제8회 사계절문학상 대상을 받은 박지리 작가의 ‘합★체’. 이 소설이 무대(9월 15~18일·국립극장 달오름극장)로 오른다. 저신장 장애인 아버지와 비장애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나 ‘작은 키’가 고민인 쌍둥이 형제 오합, 오체의 성장담이다.
주조연 배우는 6명이나, 무대엔 모두 24명이 올라간다. 연기하는 배우들, 배우마다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는 수어 통역 배우, 라이브 밴드까지…. 무대에선 수어 통역사는 물론 한글 자막, 음성 해설까지 더한다. 작품은 서로 다른 장애를 가진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무장애(배리어 프리, Barrier-free) 공연’으로 선보이기 때문이다.
“‘합★체’는 모든 것의 합체예요. 공연의 장르와 언어, 배리어프리. 여러 가지 것들의 합체예요.”
최근 국립극장에서 만난 ‘합★체’의 김지원 연출가는 이렇게 말했다. 그는 “배우의 연기, 수어 통역, 음성 해설, 음악, 시선 등 한 무대에서 너무나 다양한 언어가 나온다”며 “모두가 눈을 감아도 볼 수 있고, 시각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새로운 시도와 진화한 ‘무장애 공연’의 태동에 함께 하고 있는 김지원 연출가와 배우 김범진 박정혁 이성민을 만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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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극 ‘합★체’ 김지원 연출가는 이 작품에 대해 “배우의 연기, 수어 통역, 음성 해설, 음악, 시선 등 한 무대에서 너무나 다양한 언어가 나온다”며 “모두가 눈을 감아도 볼 수 있고, 시각만으로도 이해할 수 있는 작품을 만들어가고 있다”고 했다. 사진은 김지원 연출가, 배우 박정혁, 김범진, 이성민(왼쪽부터). 박해묵 기자 |
■ ‘우유 금지’ 합체된 캐스팅…‘장애인 당사자성’도 반영
똑 닮았지만 전혀 다른 성격, 게다가 쌍둥이, 저신장 아버지…. 소설을 무대로 옮겨오며 캐스팅은 ‘주요 관건’이 됐다.
“첫 미팅 때 생각보다 키가 너무 크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박정혁)
오체 역할을 맡은 배우 박정혁의 키는 171.7㎝. 김지원 연출가는 “원작에는 합과 체의 키가 저신장이라고 나와있지 않다”며 “‘작은 키’라고만 했는데, 얼마나 작아야 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작을수록 공감을 일으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고 돌아봤다.
작은 키의 배우를 찾았지만, 눈에 띄는 배우는 많지 않았다. “키가 크면 안된다는 것이 캐스팅 조건이었어요. 작품 동안엔 우유를 먹지 말라고 이야기했어요.(웃음)” (김지원) 박정혁 이성민의 캐스팅은 이렇게 이렇게 성사됐다. 쌍둥이답게 두 사람은 외모도 닮았다. 같은 고등학교를 나온 박정혁 이성민은 이미 학창시절부터 ‘닮은꼴’로 통했다.
오합 역할을 맡은 이성민은 170㎝다. 사실 그는 ‘작은 키’가 때때로 마음에 걸렸다. “늘 키가 작다”는 생각, “키가 조금 더 컸으면 좋겠다”는 생각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연기하는 쌍둥이 형제처럼 그랬다. “보통 오디션에 갈 때마다 깔창을 넣거나 키높이 신발을 신었는데, 이 오디션엔 당당히 단화를 신고 갔어요. 그런데 ‘깔창 깔았냐’고 물어보시더라고요. 나한테도 이런 날이 오는구나 싶었어요. (웃음)” (이성민)
‘쌍둥이 형제’는 다행히(?) 키가 크지 않았다. 농구를 하고 뛰는 장면이 많아 다이어트까지 성공했다. 박정혁은 5.7㎏, 이성민은 6㎏이나 빠졌다.
형제의 아버지는 저신장 배우 김범진이 맡았다. 그는 김지원 연출가의 ‘원 픽’이었다. 작품 안에서도 ‘공으로 기술을 부리며 쇼를 하는 예능인’으로 나오는 만큼 저신장 배우이면서 ‘몸을 잘 쓰는 배우’로 차순위가 없었다. ‘장애인 당사자성’을 반영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마음에 걸리는 부분도 없지 않았다. 김 연출가는 “장애 당사자인데, 극 중 ‘난쟁이’라는 말이 많이 나와 걱정한 부분이 있었다”고 했다.
김범진이 연기하는 아버지는 특별하다. 작품 안에 숱하게 등장하는 ‘난쟁이’라는 단어가 덧씌운 이미지를 넘어선다. “‘아버지는 난쟁이였다’로 시작해 ‘아버지는 난쟁이였다’로 끝날 수 있는 사람, 자신있고 당당하게, 당신의 지금을 열심히 살아가는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에요.”(김지원)
김범진은 “난쟁이라는 표현으로 인해 다들 많이 신경을 써주셨는데, 사실 개의치 않았다”며 “그보다는 극이 잘 나오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합★체’는 그에게 자신의 지나온 시절, 다가올 날들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었다. 김범진은 “너무 신경쓰지도, 방치하지도 않고 아무렇지 않게 키워준 부모님은 내게 다가온 벽을 넘어선 동력이었다”고 했다.
“쌍둥이들의 키에 대한 고민을 들으며 언젠가 나의 아이들도 저런 생각을 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저 역시 작은 키 때문에 쌍둥이처럼 힘들었던 적이 있었고요. 부모님을 통해 더 단단해질 수 있었지만, 전 아직 부딪혀야 할 것들이 많이 남아있고 여전히 그 과정의 연속이라고 생각해요. 그 과정에서 ‘합체’를 만났고, 아버지의 역할로 부모님에게 받은 것을 아이들에게 돌려줄 수 있는 작품이라고 생각하고 있어요” (김범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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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극 ‘합★체’는 진화한 ‘배리어프리 공연’을 보여주기 위해 ‘완벽한 합체’가 관건인 작품이다. 작품엔 수어 통역사가 등장하고, 시각장애인을 위해 공연의 사전 정보도 제공한다. 사진은 김지원 연출가와 배우 박정혁, 이성민, 김범진(왼쪽부터). 박해묵 기자 |
■ 밟히고 꼬이고…낯선 불편함의 과정을 지나 ‘합체’
음악극 ‘합★체’는 모든 장면의 ‘완벽한 합체’가 관건인 작품이다. 진화한 ‘배리어프리 공연’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새로운 시도가 많다. 수어 통역사가 등장하고, 시각장애인을 위해 공연의 사전 정보도 제공한다.
무대는 다소 복잡해 보일 수도 있다. 배우마다 청각 장애인을 위한 ‘그림자 통역’ 배우가 네 명이나 등장한다. 이들은 배우들의 대사를 수어로 통역하면서 춤도 추고, 연기도 한다. 라디오DJ 지니 역 배우는 음성 해설을 수어로 통역한다. 대본은 농인 당사자가 수어로 번역해 음성 언어와의 ‘어순 차이’에서 생길 수 있는 이질감을 줄였다.
김 연출가는 “수어 통역 배우는 배우들의 조력자이면서, 하나의 자아이기도 하고, 소품이기도 하다”며 “여러 역할을 하는 만큼 배우들과 호흡을 맞추는 데에 힘든 점이 있었다”고 말했다.
수어 통역사가 배우들을 그림자처럼 따라 다니다 보니 서로 발도 밟히고, 동선도 꼬인다. 배우들의 어려움도 수어 통역사와의 합체된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는 데에서 시작됐다. 이성민은 “배리어프리 공연은 처음이라 적응이 힘들었다”고 했다. “자꾸 어디를 가려고 하면 항상 옆에 있고, 뭔가 벽처럼 느껴졌어요. 두 달의 연습기간을 거치며 이젠 적응이 돼서, 무대에 혼자 등장하는 신에서도 함께 하니 의지가 되더라고요.” (이성민)
수어와 대사, 수어와 안무, 음성해설과 행동의 어긋남이 없어야 했다. 모든 배우들은 간단한 수어를 익혔고, 안무엔 수어 동작도 활용했다. 음악에선 공을 던지는 소리, 튀기는 소리, 기차가 지나가는 소리 등의 의성어 의태어를 살렸다. 이는 육성으로도 표현한다. 박정혁은 “기존 뮤지컬의 안무는 박자에 맞춰 동작을 하는데, ‘합★체’에선 의미 전달이 먼저이다 보니 박자는 어느 정도 무시하고 수어를 한다”며 “음악 안에 수어를 넣는 과정, 서로 다른 수어의 템포를 맞추는 과정도 쉽지 않았다”고 떠올렸다.
생전 춤 한 번 춰본 적 없는 수어 통역사들도 험난한 과정을 거쳤다. 김 연출가는 “배우는 움직이는데 수어 통역사가 가만히 있는 건 추구하는 바가 아니라 그 순간 최선을 다해달라고 요구했다”고 말했다. 조금은 어설픈 수어 통역사들의 안무는 이 작품의 웃음 포인트가 됐다. “가장 걱정됐던 장면들이 가장 재밌는 장면이 됐어요.” (이성민) “원래 합체 신의 안무인데, 완전히 뺏겼어요.” (박정혁) “아이돌 엔딩 포즈까지, 그렇게 힙하게 출지는 몰랐어요. (웃음)” (김지원)
작품엔 금기사항도 있었다. 무대의 모든 언어는 수어로 통역되는 만큼 배우들에겐 약속된 것 외의 ‘모든 애드리브’는 금지다. 이성민은 “원래 무대에서 애드리브를 많이 하는 편인데, 배리어프리 공연은 서로의 약속이 중요한 만큼 자제하고 있다”고 했다.
이 어려운 과정을 거친 ‘합★체’는 쌍둥이와 함께 “어떤 상황에서도 다시 튀어오를 수 있는 내면의 탄력도”(김지원)를 이야기한다. 아버지는 쌍둥이에게 고난과 역경이 있어도 다시 회복하는 좋은 공을 가져야 한다고 끊임없이 이야기한다.
“떨어져도 다시 튀어오르는 나만의 공이라는 건 결국 내 마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어요. 좋은 공은 마음의 차이이더라고요. ‘합★체’는 장벽에 막혀도 내일을 낙담하거나 비관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힘을 기르고 탄력도를 키워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해요. 제가 느낀 것을 관객들과도 나누고 싶어요.” (이성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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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극 ‘합★체’ 김지원 연출가와 배우 박정혁, 이성민, 김범진(왼쪽부터). 박해묵 기자 |
■ 배리어프리 공연, 장벽을 넘어 ‘합체’
“장애인 할인이 왜 있는지 아세요?”
‘합★체’의 제작기는 접근성 매니저의 ‘배리어프리 강의’부터 시작됐다. 장애예술과 특수교육 전문가인 권지현 접근성 매니저는 작품에 참여한 스태프, 배우, 연주자들과 만나 이렇게 물었다. 박정혁은 “이 질문을 받고 아무도 답을 못했다”고 당시를 떠올렸다.
“장애인 관객은 100% 공연을 보장받지 못하고, 온전히 전달받지 못하기에 장애인 할인이 있는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너무 놀랐어요. 내 티켓의 할인율만 생각했지, 이런 이유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거예요.” (박정혁)
공연을 준비하는 시간은 이들 모두에게 인식의 변화가 일어나고, ‘하나의 벽’을 넘어서는 과정이었다. 사실 배우들은 나름대로의 부담이 적지 않았다. ‘나인프리다’, ‘어느 마을’ 등의 작품을 통해 무장애 공연 경험을 쌓은 김범진은 “배리어프리 공연은 아직까지 매뉴얼이 없다 보니 배우와 창작진 모두 엄청난 압박감에 신경을 쓰게 된다”며 “장애인과 장애인, 장애인과 관객마다 생각하는 것이 달라 기준을 세우기가 쉽지 않은 작업이다”라고 말했다. 박정혁은 “사전에 정의된 배리어프리라는 용어가 너무도 어렵게 다가왔다”며 “이 공연을 하는 내가 관객들의 인식을 바꾸기 위한 사명을 가져야 하나 싶어 부담이 됐다”고 고백했다. 배리어프리 공연의 완성을 위해 모두가 ‘지난한 노력’와 ‘고민의 시간’을 거쳤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한 잘못된 표현이나 용어를 공부”했고, 작품에 녹아들며 ‘매일의 변화’를 만났다. “작은 변화가 인식을 바꾼다는 것”도 알게 됐다.
‘합★체’는 분명 진화한 배리어프리 공연이나, 김 연출가는 “모두를 만족시킬 수는 없다”고 말했다. 다만 이 과정에서 딱 1㎝ 만큼의 변화와 공감, 소통을 희망한다. 극단 다빈나오의 상임 연출가로 20여년간 장애예술인과 작업해온 그는 “이런 시도가 우리에게 다양한 언어와 표현 방법이 있다는 것에 대한 인지를 준다면 좋겠다”며 “무대엔 음성 언어만 있는 것이 아니라 수어도 있고, 음악의 언어, 몸의 언어, 예술의 언어가 있다는 것, 한 작품을 가지고 이렇게 다양한 언어로 표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과정이길 바란다”고 말했다.
무대 위에 공존하는 다양한 언어만큼, 객석엔 다양한 표현 방식이 자리한다. 김 연출가는 “공연이 끝날 때 서로 다른 모습으로 박수를 치는 모습, 모두가 공감하는 표현의 언어가 다르다는 점을 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농인, 시각장애인, 비장애인이 한 공간에 공존하고 소통한다는 것이 중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조금씩 나의 불편을 감수하고, 서로에게 양보하면서 함께 하는 것, 그게 배리어프리의 매력이에요. 비장애인 관객들에게 배리어프리가 하나의 장르이자, 공연의 양식으로 다가갔으면 좋겠어요.” (김지원)
“이모께서 다리가 불편하신데,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고 생각해 제 공연을 한 번도 보지 못하고 돌아가셨어요. 그래서인지 이 작품이 제겐 운명처럼 느껴졌어요. 배리어프리 공연을 하며 의미가 다르게 전달될까 두려움이 있어요. 비장애인 관객 중에도 배리어프리가 낯설고 불편한 분들이 있을지 몰라요. 그런 걱정 내려놓고 편하고 재밌게 볼 수 있는 공연이에요.” (박정혁)
헤럴드경제 / shee@heraldcorp.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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