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 배우는 누구야?” 연일 동시간대 토일드라마 시청률 1위를 수성하고, 매회 자체 최고 시청률을 경신 중인 JTBC 드라마 <킹더랜드>가 끝날 때마다 시청자들이 김선영에게 보이는 반응이다. 킹그룹 후계자 구원(이준호)과 호텔리어 천사랑(임윤아)의 로맨스 못지않게 <킹더랜드>의 인기를 견인하는 플롯은, 구원이 누나 구화란(김선영)과 벌이는 상속 전쟁이다. 1999년 뮤지컬 데뷔 이래 수많은 화제작에 출연하며 ‘한국 뮤지컬의 여왕’으로 군림해온 김선영은 <킹더랜드>로 처음 매체 연기에 도전했다. 김선영은 전형적인 반동인물의 연기 톤과는 다른, 나직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상대를 위협하며 매회 시청자들에게 신선한 충격을 선사 중이다.
– <킹더랜드>에 캐스팅됐다는 소식이 방영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이전에도 드라마 제안이 있었을 텐데.
= 10년쯤 전 뮤지컬 외 분야에서 연기해보고픈 열망이 한창 일던 시기가 있었다. 연기는 어디서 하든 참 재밌고 즐거운 작업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때는 예정된 뮤지컬 차기작이 계속 있었다. 무대에 서는 게 가장 자연스럽다고 느끼면서도, 연기자로서 다양한 곳에서 연기를 경험해보고 싶은 마음은 있었다. 그러던 중 <킹더랜드>측에서 섭외 제안이 왔다. 모든 일은 타이밍이 맞아야 하지 않나. 제의가 왔던 시기에 내가 중요한 공연을 앞두고 있었다면 <킹더랜드> 출연을 엄두도 못 냈을 텐데, 마침 일정을 조정할 수 있는 때였다.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 방영 전 촬영이 종료된 것으로 안다. 첫 방송을 기다리던 심정은 어땠나.
= 거짓말처럼 들리겠지만, 이번이 매체 첫 도전이다보니 욕만 먹지 말자는 마음이었다. (웃음) 물론 다른 장르에서도 최선을 다하는 20여년차 배우의 모양새가, 후배 뮤지컬 배우들에게 보기 좋길 바라는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 최후의 욕심이고, 드라마에 잘 녹아나는 게 먼저였다. 그런데 아직 방송은 못 봤다. 무대에 설 때도 스폿 촬영이나 프레스콜 영상 같은 걸 잘 못 본다. 워낙 내가 지나간 일은 지나간 대로 두고 현재에 집중하는 스타일이다.
– 공연의 경우 공개 전 몇달씩 연습한 후 무대에 올라 또 몇달을 연기한다. 반면 영화나 드라마는 긴 리허설 과정도 없고, 촬영마다 다른 에피소드를 찍는다. 이 점이 낯설진 않았나.
= 당연히 낯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가 매체에서 오래 일한 분들처럼 순식간에 모드 전환을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공연의 경우 배우가 스스로를 예열할 수 있는 시간이 충분하다. 그런데 카메라 앞에 서는 일은 그렇지 않았다. ‘레디, 액션’ 하면 바로 상황에 몰입해야 하고, 장면과 장면 사이 시간 차도 상당히 짧더라. 심지어 상대역 없이 바스트숏을 찍어야 할 때도 있었다. 무대에서는 옆에 상대역이 없으면 사고인데! 카메라 앞에서 연기하는 건 생각보다 상상력이 필요한 일이었다. 언제 어디서든 연기에 몰입할 태세를 갖추기 위해선 늘 내가 연기하는 배역의 상황을 상상하고 있어야 했다. 매체 연기자들이 그동안 지독하게 자기와의 싸움을 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자주 출연하지 않아도 일순간 서사 안으로 자기를 집어넣어야 하니까.
– 무대 필모그래피를 생각해봐도 <레베카>의 댄버스 부인 정도를 제외하면 악역은 연기한 적 없다.
= 그렇다. 무대 위 내 배역이 강한 카리스마를 뿜는 역할이었을 뿐이지, 악역은 연기해본 적이 거의 없다. 그리고 막상 뮤지컬엔 악인이 많지 않다. 설령 악한 캐릭터가 나와도 뮤지컬은 3시간 안에 해결을 봐야 하기 때문에 안타고니스트가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 설명해주고, 심지어 결론도 일일이 내준다. 그런데 매체로 넘어와 보니 여긴 밑도 끝도 없는 악인들이 너무 많더라. 악행에서 시작해 악행으로 끝나는 캐릭터를 연기해야 하는 매체 연기자들의 노고를 이번 기회에 생각하게 됐다.
– 구화란은 구원을 포함해 모든 등장인물과 대치 중이다. 매번 팽팽한 에너지를 끌어내야 하는 작업이 어렵진 않았나.
= 캐릭터가 이렇게 될 수밖에 없다는 정당성을 찾다 보면 그런 에너지가 자연스럽게 나온다. 구화란은 회당 한번은 구원에게 “너 따위가”와 같은 센 대사를 뱉는다. 이런 말을 동생한테 서슴없이, 심지어 여유롭고 침착하게 뱉는 사람이라면 동기가 있을 것 아닌가. 나는 구화란이 인간 병기처럼 길러진 여자라고 봤다. 친엄마는 일찍 죽어 믿을 구석은 아버지밖에 없는데 아버지는 화란에게 생존의 법도만 가르치고 사랑은 주지 않았다. 구화란은 야욕이 있는 사람이 아니다. 다만 성과를 내야 타인으로부터 사랑받을 수 있다는 인지도식이 머리에 박힌 여자라 매 순간을 투쟁하며 사는 것이다.
– 구화란의 대사는 언제나 “내 호텔이야”처럼 ‘나’로 시작한다. 자기 확신이 강한 사람의 대사처럼 들리지만 사실 이같은 발화는 자기 확신이 없는 사람들이 스스로를 자신 있는 척 둔갑할 때 사용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 그렇다. 화란에겐 온전한 ‘내 것’이 없다. 핏줄인 아버지조차 구원의 편인 것 같은 열등감과 패배의식에 사로잡힌 사람인데 그렇지 않은 척 스스로를 매번 포장하고 그 모습을 아버지에게 인정받아야 한다. 너무 힘들고 피곤하게 산다.
– 의문이긴 한다. 구화란이 지금껏 상무로서 회사도 잘 경영했고, 심지어 집안의 장녀인데 왜 갑자기 굴러온 남동생 원이와 싸워야 하나.
= 아무래도 원이가 아들이니까. (웃음) 구화란도 당연히 그렇게 생각할 거다. 회사를 키운 건 자긴데 하고. 시대가 바뀌니 시청자들이 이렇게도 의문을 제기하는 것 같다.
– 뮤지컬은 관객이 온전히 자신의 눈으로만 극을 보아야 한다. <킹더랜드>를 찍는 동안 배우의 디테일한 연기를 카메라가 밀착해 촬영할 때 느끼는 쾌감도 있었나.
= 나에게는 뮤지컬 관객을 향한 전적인 신뢰가 있다. 배우가 연기에 진심을 담으면, 무대와 멀리 떨어진 자리에 앉은 관객들도 배우의 세밀한 연기를 모두 알아챈다. 이번 드라마를 촬영하던 중 뮤지컬 <호프>의 세 번째 공연을 무대에 올렸다. 어쩌면 다른 장르에 잠시 다녀온 직후라 무대 위 나의 연기 결이 전과 달랐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마저도 무대에서 통하더라. 그래서 무대 연기, 매체 연기 등의 경계가 내 안에서 허물어지는 중이다. 배우 안의 여러 기제가 충만하면 크고 과장된 연기를 하지 않아도 관객들은 다 받아들인다. 관객들에게 항상 감사하다.
– 최근 무대 경력 중엔 <하데스타운>을 빼놓을 수 없다. 작품의 연습 시작 시기부터 마지막 공연까지 꼬박 1년을 함께했고, 대중과 평단 모두에게 큰 호평을 받은 작품이다. 이 작품으로 여우조연상도 받았다.
= 내가 연기하면서도 작품이 좋다는 이야기를 나도 모르게 많이 하고 다녔다. 단출한 세트 위에서 풍성한 레이어의 이야기가 만들어지고, 그 이야기들이 관객에게 묵직한 힘으로 전달된다. 무대 효과라고 해봤자 벽 하나 갈라질 뿐인데 관객에게 엄청난 흡인력과 충격을 선사하는 작품이다.
– 돌아보면 코로나19가 정말 길었다. 영화계만큼 공연계도 어려운 시간을 통과해왔는데, 팬데믹 중에도 무대를 지킬 땐 어떤 마음이었나.
= 힘이 빠지고 착잡해지는 순간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그런 순간에도 관객들 또한 마스크를 쓰고 밀폐된 극장에 몇 시간씩 앉아 극장을 지켜주셨다. 함성도 못 지르고 열렬한 박수만 객석에서 보내주실 때 무대 위에서 관객들의 마음을 온전히 전달받았다. 관객과 배우가 서로를 위로하면서 코로나19를 버텼던 것 같다. 함성 금지 조치가 <하데스타운>의 부산 공연 즈음부터 해제됐다. 그때 관객들이 객석에서 보내주신 엄청난 환호성을 잊지 못한다. 무대 위에서 느낀 감동이 엄청났다.
– 실존 인물이나 원작 영화·소설이 존재하는 작품이어도 이를 레퍼런스로 활용하지 않는다는 연기론을 여러 차례 밝혔다.
= 넘버와 대사만으로 캐릭터의 전사를 치밀하게 연구하는 편이다. 작품이 캐릭터가 지닌 고유의 성질을 설명해주지 않는다. 그렇다면 배우가 할 일은 인물의 전사를 집요하게 고민하며 캐릭터의 말투, 걸음걸이 등 이 사람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된 수많은 가능성을 탐색하는 것이다. 이 과정을 거쳐야만 비로소 ‘노래로’ 연기가 가능하다. 뮤지컬은 내러티브 중간에 노래를 해야 한다. 배우가 캐릭터를 세밀하게 구축해놓지 않으면 넘버가 단순 가창으로만 끝날 수 있다.
– 메릴 스트리프를 좋아한다는 말을 여러 차례 했다.
= 여전히 좋아한다. 지난 몇년간 메릴 스트리프만큼 빠져 있는 배우는 케이트 블란쳇이다. 블란쳇의 연기도 좋아하지만 결정적으로 그의 인터뷰를 보고 반했다. 한 인터뷰어가 블란쳇에게 “당신의 연기는 메소드 액팅인가?”라고 물었을 때 블란쳇이 “그렇지 않다. 나는 자녀들을 돌보며 일상을 지키는 것이 훨씬 중요한 사람이다”라는 답을 했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상을 충실히 보낼 때 연기자로 살아갈 힘이 생긴다는 그의 답변이 내가 지닌 연기 철학과 통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블란쳇처럼 일상도 잘 살고 연기도 잘하고 싶다.
– 많은 여성 뮤지컬 배우들이 특정 연령을 넘어도 여전히 여성배우가 주연으로 뮤지컬 무대에서 활약할 수 있도록 자리를 지켜준 김선영 선배에게 고마움을 느낀다는 말을 전한다.
= 내가 독립투사는 아니기 때문에 후배 배우들에게 선배로서 책임을 느끼는 게 자칫 교만으로 들릴 수도 있어 조심스럽다. 40대 여성배우가 극의 주연이어도 문제가 없는 시대까지 내 삶을 무대 위에서 열심히 살았을 뿐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누군가가 나를 그렇게 책임감 있는 선배로 봐준다면 그것만큼 행복한 일은 또 없을 것이다.
– 뮤지컬 <지킬 앤 하이드>의 루시를 연기하던 시절, 남자 후배들에게 했던, “내가 남자로 태어났으면 다 죽었어. 내가 지킬 했으면 여성 팬 수백명을 끌고 다녔을 거야”라는 말이 여전히 뮤지컬 팬들에게 인용된다.
= 그 말 기억한다. 그리고 그 생각은 여전히 변함없다. (웃음) 내가 지킬과 하이드를 연기했으면, 이제껏 남성배우들이 연기했던 지킬과 하이드와는 또 다른 결의 퍼포먼스가 나를 통해 나오지 않았을까. 이 말이 누군가에게 통쾌하게 들린다면 나는 좋다!
– 2001년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신인상 후보에 올랐다. 이르지만 내년 백상예술대상에서 드라마 부문 신인상 후보도 노려볼 만하지 않나.
= 그때 내가 후보에 올랐다는 사실도 잊고 있었다. 또 신인상 후보에 오르기엔 내 연식이 걸리긴 하지만, 지금의 나이와 경력을 갖고도 어떤 분야에선 신인이 된다는 사실이 무척 재밌다. 나를 신인이라 소개했을 때 상대가 민망해하는 것도 재밌고. (웃음) 나이 많은 신인, 멋있지 않나?
글 정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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